DAYDREAM NATION

'영화관/미리보는 영화'에 해당되는 글 142건

  1. '스윗 프랑세즈'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믿음과 사랑
  2. '특종: 량첸살인기' 진실과 거짓의 경계 위에서
  3. '마션' 삶에 대한 깊은 긍정과 의지
  4. '메이즈 러너: 스코치 트라이얼', 울타리 밖 세상과 마주한 아이들
  5. '사도', 아버지와 아들, 그 지독한 관계에 대해
  6.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튼' 거리의 삶, 힙합의 진심
  7. '오피스', 누가 이들 손에 칼을 쥐게 만들었나
  8.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여름 대작 속 놓쳐서 안될 빛나는 발견
  9. '협녀, 칼의 기억', 칼로도 잘라내지 못한 감정의 사슬 (1)
  10. '뷰티 인사이드', 평범함을 특별하게 만든 로맨스
  11. '미쓰 와이프' 돈·성공보다 중요한 가족의 가치
  12.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 에단 헌트, 팀으로 돌아오다
  13. '베테랑', 뻔뻔한 재벌 향한 통쾌한 주먹
  14. '픽셀', 키덜트 향수 자극하는 액션 어드벤처
  15. '암살', 역사의 무게감과 장르의 절묘한 만남
  16. '종이 달', 돈의 탐욕, 벗어날 수 없는 욕망의 민낯
  17. '손님', 공동체와 타자, 한국사회의 내면을 파헤치다
  18.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심폐소생술로 가까스로 살려낸 시리즈
  19. '인사이드 아웃', 상상력과 감성, 픽사의 제대로 된 '부활'
  20. '나의 절친 악당들', 돈과 권력 향한 임상수 감독의 하이킥
  21. '경성학교', 이상하지만 매혹적인 영화
  22. '쥬라기 월드', 욕심부리지 않고 이룬 시리즈의 부활
  23. '극비수사', 소신껏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위로
  24. '연평해전', 잊지 말자는 외침 뒤에 감춰진 질문
  25. '샌 안드레아스', 공식대로 만든 재난영화

'스윗 프랑세즈'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믿음과 사랑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전쟁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비인간적이고 행위다. 무자비한 폭력과 억압 속에서 이성과 양심을 지키며 야만에 빠지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지독한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믿음이다. 


'스윗 프랑세즈'는 전쟁마저도 빼앗아갈 수 없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 바로 사랑과 믿음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영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로 망명한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작가 이렌 네미로프스키가 쓴 동명의 미완성 유작 소설이 원작이다. 이렌 네미로프스키는 5부작으로 구상한 소설 중 2부까지만 완성한 뒤 1942년 나치에 붙잡혔다. 아우슈비츠에서 39세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영화는 2004년 뒤늦게 발표된 작가의 소설 중 2부 '돌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꾸몄다. 


영화의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 뷔시다. 전쟁터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던 루실(미셸 윌리엄스)은 마을을 점령한 독일군 장교 브루노(마티아스 쇼에나에츠)를 자신의 집에 들이게 된다. 타인이면서 적인 남자와의 뜻하지 않은 공동생활에 적대감을 느끼던 루실은 그러나 브루노의 피아노 연주를 듣게 되면서 마음이 조금씩 흔들린다. 


영화는 루실과 브루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나간다. 그 속에는 전쟁 속에 숨겨진 인간적인 모습이 있다. 마을에 찾아온 젊은 독일군에게 호감을 느끼는 프랑스 여인, 자신의 아내를 탐하려는 독일군에게 분노와 질투를 느끼는 남자,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이기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까지 영화는 전쟁이라는 비극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바라본다.


그러나 영화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루실이 바로 그런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루실과 브루노의 이야기에는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서는 인간적인 교감이 있다. 소작농을 매정하게 대하는 시어머니가 불편한 루실, 그리고 전쟁보다는 피아노 연주가 더 좋은 브루노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잠시나마 마음을 나눈다. 그렇게 영화는 전쟁도 사랑과 믿음을 지울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우린 서로의 감정을 단 한 번도 말하지 못했다. 사랑이란 한 마디조차도…"라는 루실의 대사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마음 속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특종: 량첸살인기' 진실과 거짓의 경계 위에서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노덕 감독의 영화 '특종: 량첸살인기'를 언론시사회에서 보는 것은 조금은 묘한 경험이었다. 진실이나 사실보다는 사건과 이슈에만 집착하는 언론의 부정적인 단면을 꼬집는 장면이 영화 곳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코믹한 장면에서도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기자보다 일반 관객이 더 객관적으로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잠깐 생각했다. 


영화는 어느 방송국 사회부 기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조정석이 연기하는 허무혁이다. 보도자료에는 '열혈 기자'라고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허무혁은 사명감보다 생활인으로서 기자 일을 하는 평범한 직장인에 가깝다. 물론 그에게는 광고주가 얽힌 사건도 거침없이 취재하는 대범함이 있다. 그러나 그 대범함 뒤에는 "몰랐다"는 변명도 숨겨져 있다. 


사건은 허무혁이 연쇄 살인사건에 얽힌 특종을 쫓게 되면서 시작된다. 휴직 처분에 항의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게 된 특종이다. 허무혁은 연쇄 살인범의 정체를 안다는 의문의 전화를 받고 몇 가지 단서를 찾아낸다. 그리고 특종을 잡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때까지도 허무혁은 알지 못한다. 그 믿음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특종: 량첸살인기'는 무척 도발적이다. 관객을 향해 진실과 거짓의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하기 때문이다. 진실과 거짓, 사실과 허구를 논하는 최전선에 놓여 있는 언론사를 무대로 삼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영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더 이상 진실에 닿을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지 않냐고 반문한다.


TV·인터넷·스마트폰 등을 통해 우리는 매일 수많은 정보를 접한다. 과거에 비하면 정보에 대한 접근은 수평적이 됐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사실이고 우리가 믿는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화의 웃음은 이런 현실에 대한 풍자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특종이 오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허무혁이 취하는 행동,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방송국 사람들의 태도가 그렇다. 물론 영화 속 언론사의 묘사는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일정 부분은 지금 언론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마냥 웃기에 씁쓸함이 남는다. 


다만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세상은 왜 이렇게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힘든 곳이 됐는가. 도발적인 영화는 이 질문 앞에서 머뭇거린다. 언론사를 무대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폐부를 날카롭게 파헤치지 못한다. 언론의 이야기로 출발한 영화는 예상에서 다소 빗나가는 지점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처음 제목이었던 '저널리스트'처럼 언론에 보다 집중해서 이야기를 파고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션' 삶에 대한 깊은 긍정과 의지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우리는 살고 있다. 매일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는다. 생명을 갖고 태어난 존재에게 삶이란 고민해볼 여지가 없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신작 '마션'을 보면서 떠오른 것은 바로 이 '삶'에 대한 생각이었다.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이 우리의 삶을 유지하게 하는가. 물론 영화는 이런 철학적인 문제의식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는다. 불가능한 생존기를 그럴싸하게 그려낸 잘 만들어진 SF영화일 뿐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관객에게 삶의 의지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영화를 보는 동안 벅차게 뛰어오르는 심장 박동과 함께 말이다.


영화는 NASA의 화성 탐사대 이야기다. 예정대로 탐사를 진행하던 이들은 뜻하지 않은 모래폭풍으로 갑작스럽게 탐사를 철수하게 된다. 순식간에 덮친 폭풍우 속에서 생물학자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가 실종된다. 남은 탐사대원들은 마크가 죽었다고 생각하며 우주선에 몸을 싣는다.


화성에는 물도 산소도 없다. 지구의 생명체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별이다. 이곳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과도 같다. 단지 식량 때문만은 아니다. 불안·고독·두려움·절망 등 심리적 고통과도 마주해야하기 때문이다. 폭풍우가 지나간 뒤 홀로 정신을 차린 마크도 처음 접하는 것은 바로 이 절망이다.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삶의 의지를 부여잡는다. "나는 여기서 죽지 않아." 끊임없이 되뇌는 이 단호한 한 마디가 마크로 하여금 불가능한 생존을 가능하게 만든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설득력을 부여한다. '그래비티' '인터스텔라' 등에서 보여준 간접적인 우주 체험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마션'의 가장 큰 매력은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 긍정과 낙관의 정서다. 그 중심에 마크라는 캐릭터가 있다. 그는 자신을 버리고 간 동료들에게 "여러분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며 오히려 위로를 건넬 정도로 긍정적인 인물이다. 그런 마크가 살아남기 위해 안간 힘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스스로 잊고 지냈던 삶의 의지를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붉은 화성의 너른 대지 위를 로버를 타고 홀로 이동하는 마크의 모습은 경이롭다. 동시에 우주라는 공간이 얼마나 고독한 곳인지 생각하게 된다. 마크는 이 고독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는 짧은 말 한 마디로 답한다. "눈앞에 닥친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다 보면 살아서 돌아오게 된다." '마션'은 SF 장르 속에 삶에 대한 깊은 긍정과 의지를 담은 작품이다. 노장 감독이 뒷짐을 진 채 넌지시 건네는 인생의 조언 같기도 하다.

'메이즈 러너: 스코치 트라이얼', 울타리 밖 세상과 마주한 아이들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세상에 홀로서는 것이다. 그 누구의 보호도 받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은 곧 세상의 잔혹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진리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무작정 세상을 향해 내달린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성장통이 필요한 이유다.


'메이즈 러너' 시리즈는 SF 게임 형식으로 담은 일종의 성장담이다. 게임처럼 스테이지를 뛰어넘을수록 성장해 가는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는 '메이즈 러너'만의 고유한 방식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아이들의 성장담을 판타지 장르로 승화시킨 작품을 만난 바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그렇고 '헝거 게임' 시리즈가 그렇다. 


'메이즈 러너' 시리즈의 매력은 다른 시리즈와 굳이 차별점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아류작이 되든 말든 상관없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어떻게 보면 뻔뻔한 태도지만 이상하게 끌린다. '메이즈 러너' 시리즈의 강점이다. 이는 2편인 '메이즈 러너: 스코치 트라이얼'(이하 '메이즈 러너2')에서도 계속된다.


전작 '메이즈 러너'는 미로라는 의문의 공간을 통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영화 속 미로는 가정과 학교처럼 아이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에 대한 은유와도 같다. 세상은 아이들에게 울타리를 벗어나지 말라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끊임없이 그 울타리를 궁금해 하고 그 바깥을 상상한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 없이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아이들을 더 크나큰 위험과 마주한다. 그것이 세상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메이즈 러너2'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무작정 세상을 벗어나고 싶어 한 아이들은 폐허로 변해버린 도시를 허망하게 바라본다. 자신들을 제대로 보호해줄 또 다른 세상을 찾아 힘든 길을 떠나지만 그럴수록 아이들에게 남는 것은 몸과 마음의 상처뿐이다. 이제 아이들은 비로소 세상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토마스(딜런 오브라이언)를 비롯한 친구들이 세상과의 싸움을 다짐하며 마무리되는 결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메이즈 러너' 시리즈가 그리는 세계는 사실 처음부터 나쁜 시스템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시스템과의 싸움을 결심한다. 영화 속 가상의 단체 '위키드'로 대변되는 세상은 아이들에게만큼은 악(惡)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메이즈 러너2'는 특출난 오락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주체적으로 성장해가는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진진다. 이들의 성장담을 응원하고 싶다.

'사도', 아버지와 아들, 그 지독한 관계에 대해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보는 동안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그만큼 몰입도가 뛰어나다는 뜻이다. 그런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글을 쓰는 게 의미 없게 느껴진다. '백문이 불어일견'처럼 제 아무리 글로 표현해도 직접 보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이준익 감독의 '사도'가 그런 영화다. 


'사도'는 캐스팅 단계부터 일찌감치 기대작으로 손꼽혔다. 송강호, 유아인이라는 두 걸출한 배우의 만남부터 그랬다. '소원'으로 연출 복귀에 성공한 이준익 감독이 자신의 장기인 사극으로 돌아왔다는 점도 영화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켰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한국인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익숙한 이야기다. 여기에서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낼지 궁금했다. 



그러나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그런 의문을 잊게 만든다. '사도'의 오프닝은 최근 개봉한 사극 영화들 중 가장 긴박하고 강렬하다. 다른 사극 영화처럼 역사적 배경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이준익 감독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가둬진 순간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8일 동안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영조는 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둘 수밖에 없었는가.' 이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사도'의 가장 큰 원동력이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대답이다. 그러나 이준익 감독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에 관심을 둔다. 영화가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방식을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뒤주에 갇힌 아들을 바라보며 아버지 영조(송강호)는 어릴 적 총명했던 사도세자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뒤주에 갇혀 목이 마른 나머지 오줌을 받아 마시는 사도세자(유아인)는 자신의 그림으로 만든 부채를 보며 세손이 탄생한 순간을 되돌아본다. 행복했던 과거와 비극적인 현재의 대비는 영화의 비장함을 더욱 깊게 만든다.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영조는 아들을 강하게 키우고 싶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아버지가 자신을 그저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기를 바랐다. 서로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면서 갈등을 빚는 두 사람의 모습은 여느 아버지, 아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는 뻔한 해석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공감이 가는 것은 송강호, 유아인의 열연 때문이다. 세대를 초월한 두 배우의 연기 앙상블은 '사도'의 백미다. 


사실 '사도'에는 사극영화에서 흔히 기대하게 되는 대단한 볼거리가 없다. 명배우들의 열연, 그리고 주제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뚝심 있는 연출만이 있을 뿐이다. 인물의 감정만으로 러닝타임을 끌고 가는 사극영화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이준익 감독의 새로운 대표작이 탄생했다.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튼' 거리의 삶, 힙합의 진심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음악에는 힘이 있다. 힘들 때는 웃음을 주기도 하고, 슬픔을 대신해 눈물을 흘려주기도 한다. 때로는 우리의 분노와 억울함을 대변해준다. 그렇게 음악은 사람들을 하나로 만든다.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튼'(감독 F. 게리 그레이)은 거리에서 태어난 음악인 힙합에 대한 영화다. 1980년대 후반 등장해 미국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던 힙합 그룹 N.W.A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겼다. 닥터 드레, 아이스 큐브, 이지-E 등 국내 힙합 팬들에게도 익숙한 뮤지션들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그 속에는 흑백 차별이 여전했던 미국 현대사의 단면도 담겨져 있다.


영화의 시작은 1986년의 미국 캘리포니아 컴튼이다. 이곳은 폭력과 마약이 난무하는 무법지대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은 이들을 색안경을 낀 채 바라본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경찰들은 아무 죄 없이도 이들을 폭력적으로 대한다.


부조리한 세상은 10대들의 눈에도 마냥 좋게 보이지 않는다. 이지-E(제이슨 미첼), 닥터 드레(코리 호킨스), 아이스 큐브(오셔 잭슨 주니어)는 자신들이 겪고 있는 현실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음악이 곧 이들의 공통 분모다. DJ 옐라(닐 브라운 주니어), MC 렌(알디스 호지)가 가세하면서 이들은 '행동하는 흑인들'이라는 뜻의 그룹 N.W.A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다.


영화 전반부는 흑백 차별이 여전하던 80년대 후반 N.W.A가 일으킨 사회·문화적 파장에 초점을 맞춘다. 폭력적인 세상의모습을 있는 그대로 가사에 담은 N.W.A의 노래는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며 큰 충격을 안긴다. 그 정점은 디트로이트 공연이다. 경찰의 폭력에 저항하는 노래 '퍽 더 폴리스(F*ck Tha Police)'와 함께 벌어지는 폭동 장면은 80년대 후반 미국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성공은 오래 가지 않는다. 영화 후반부는 계약 문제를 둘러싼 갈등, 그리고 그룹 해체 이후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멤버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통해 이들의 활동이 90년대 갱스터 랩의 태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자세하고 보여준다. 힙합 팬이라면 영화 말미에 잠깐 등장하는 스눕 독과 투팍의 모습에 양손을 절로 들게 될 것이다. 


N.W.A가 지적한 미국 사회의 부조리함은 결국 로드니 킹 사건으로 곪아터진다. 그러나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이들이 작은 다툼으로 각자만의 길을 걷게 되는 모습은 세상과의 타협 같아 아쉬움이 든다. 물론 영화는 그 아쉬움까지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으로 '이탈리안 잡' '모범시민' 등의 액션 영화를 연출했던 F. 개리 그레이 감독은 147분의 러닝타임 동안 자신의 장기를 살린 리드미컬한 연출을 보여준다. 힙합의 진심을 조명한 훌륭한 음악영화다.

'오피스', 누가 이들 손에 칼을 쥐게 만들었나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오피스'(감독 홍원찬)는 어느 평범한 회사원의 가족 살해 사건을 소재로 한 스릴러 영화다. 직장이라는 일상적인 공간을 공포의 무대로 삼아 긴장과 서스펜스를 만들어내 호러영화 같은 분위기도 자아낸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 한 구석이 아프다.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참혹한 이야기가 남일 같지가 않아서다.


영화는 어느 회사의 영업부 직원들이 이야기를 그린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그런 조직이다. 실적과 매출만으로 직원을 평가하는 부장이 있고, 그런 부장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안간 힘을 다하는 대리가 있으며, 눈치껏 대충대충 일하려는 사원들이 있다. 이들 사이에서 묵묵히 맡은 일만 열심히 하는 과장, 그리고 정규직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인턴 등이 바로 '오피스'의 주인공이다.



사건은 김병국(배성우) 과장이 일가족을 살해하고 종적을 감추면서부터 시작된다. 경찰이 수사에 나서지만 직장 동료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책임감 강하고 고분고분하며 일밖에 몰랐던" 김병국 과장이 가족을 죽일 리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사건이지만 그럼에도 영업부 직원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을 한다. 단 한 사람, 김병국 과장을 잘 따랐던 인턴 이미례(고아성)만이 사무실 안에 생겨난 작은 균열을 예감할 뿐이다.


묵묵히 일하며 번듯한 집과 가족을 꾸리며 살아가던 평범한 가장이 무엇 때문에 이토록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긴장감도 바로 이 질문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오피스'는 그 대답을 주변 인물들로부터 찾아간다는 점에서 보통의 스릴러 영화와 다르다. 영화가 김병국 과장보다 사건을 대하는 동료 직원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다. 그리고 여기에 영화의 진짜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영화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장면들로 가득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김병국 과장이 이미례에게 서랍 속에 숨겨진 칼을 보여주는 신이다. 김병국 과장은 말한다. "칼을 손에 쥐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마치 묵주와도 같다"고 말이다. 일련의 사건 속에서 영업부 직원들은 하나 둘 죽거나 사라진다. 그리고 뜻밖의 범인이 등장한다. 정말 더 큰 공포는 범인의 정체에 있지 않다. 바로 회사라는 조직이 평범한 사람들 손에 칼을 쥐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때때로 현실인지 상상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경험을 한다. 그것은 회사라는 조직이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그만큼 엉망으로 만든다는 사실에 대한 은유와도 같다. '오피스'를 보고 나면 마음 한구석에 슬픈 여운이 오래 남는다. 영화보다 더 스릴러 같은 현실이 지금도 회사 어딘가에서는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여름 대작 속 놓쳐서 안될 빛나는 발견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사람들은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성공과 행복이 따라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그런 성실함과 열정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자본이 지닌 탐욕을 체화하지 않고서는 성공을 이룰 수 없는 세상, 그것이 한국 사회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이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오직 성실하게 살아온 어느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사회의 이면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 영화다.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 '늑대소년'의 조성희 감독, '잉투기'의 엄태화 감독 등 주목할 신인 감독들을 배출해온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의 장편제작연구과정 작품이다. 단편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더블 클러치' 등을 연출한 안국진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의 주인공 수남(이정현)은 기구한 삶을 살고 있는 여성이다. 16세 때 보다 행복한 삶을 위해 공장 취직이 아닌 고등학교 진학을 선택한 수남은 학교를 다니며 자격증을 14개나 따며 능력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졸업과 동시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수남은 자신이 취득한 자격증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한다. 그리고 술을 배우고 남자를 만나게 된다.


수남의 바람은 소박하다. 사랑하는 남자와 행복한 가정을 꾸려 살아가는 것이다. 공장에서 만난 남자 규정(이해영)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된 수남은 아이를 낳기를 바란다. 그러나 규정은 아이보다 집이 먼저라고 말한다. 하지만 가난한 노동자 부부에게 집은 멀고 먼 꿈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규정은 공장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한다. 그때부터 수남은 남편의 행복을 위해 무엇이든 열심히 하기 시작한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다루는 소재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들이다. 노동자의 열악한 근무 환경, "꾸준히 일한 만큼 꾸준히 오르는" 집값 문제, 그리고 재개발을 둘러싼 주민들의 갈등 등이다. 그러나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빌려온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영화는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판타지의 색깔로 녹여낸다. 색다른 시도를 그럴싸하게 담아낸 기발한 연출력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 중심에는 수남이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있다. 앨리스가 토끼에 이끌려 이상한 나라를 모험하듯, 수남 또한 무언가에 홀린 듯 한국 사회를 떠돈다. 영화는 가난한 노동자 여성이지만 동시에 순수함 그 자체인 수남의 시선으로 한국 사회의 여러 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오직 탐욕만을 쫓으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세상이 곧 한국 사회라고 말한다. 인간에 대한 존엄과 품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죽음을 맞이할 때만 존엄과 품위를 갖출 수 있을 뿐이다.


코믹 잔혹극을 표방한 만큼 영화는 다소 잔혹한 장면을 담고 있다. 그 잔혹함 속에 쓴웃음이 짙게 배어있다. 이정현은 박찬욱 감독으로부터 시나리오를 추천 받아 영화에 출연했다. 그래선지 영화 곳곳에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같은 느낌도 풍겨난다. 쉽지 않은 수남을 설득력 있게 소화해낸 이정현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여름 대작들 사이에서 놓쳐서는 안될 빛나는 발견이다.

'협녀, 칼의 기억', 칼로도 잘라내지 못한 감정의 사슬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협녀, 칼의 기억'은 비운의 운명을 짊어진 세 남녀의 이야기다. 권력을 향한 탐욕에 사로잡힌 남자, 그런 남자에게 배신을 당한 여자, 그리고 이들에게 부모를 잃고 복수를 꿈꾸는 소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영화는 무협의 세계와 멜로의 감성을 모두 담는다. 그 속에서 칼로도 잘라낼 수 없는 깊은 감정의 사슬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홍이(김고은)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부모를 향한 복수를 꿈꾸며 무술 실력을 길러온 소녀다. 저잣거리에서 무술대회를 연 유백(이병헌)은 우연히 대회에 참가한 홍이의 무술 솜씨에서 18년 전 자신과 함께 했던 월소(전도연)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월소는 홍이에게 자신과 유백이 홍이의 부모를 죽인 자라는 진실을 털어놓는다. 홍이는 혼란에 빠지고, 유백은 홍이와 월소를 쫓는다. 세 사람의 엇갈린 운명은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미술, 소품, 세트 등 미쟝센에 신경 쓴 연출이 눈에 띈다. 노란 해바라기가 핀 초록 들판을 달려가는 홍이의 첫 등장, 붉은 빛의 의상으로 카리스마를 표출하는 유백, 그리고 순백의 옷으로 신비로움과 비밀스러움을 동시에 드러내는 월소 등 의상에서도 캐릭터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 


무협 장르답게 액션 신도 다채롭다. 푸른 들판에서 펼쳐지는 월소와 검객들의 대결, 그리고 대나무 밭에서의 홍이의 훈련 모습은 무협영화에 기대할 만한 장면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영화 후반부 세 인물이 만나면서 펼쳐지는 액션 시퀀스는 '협녀, 칼의 기억'의 백미다. 롱 테이크와 고속 촬영 등으로 우아함과 비장함을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무협 액션이다.


중요한 것은 영화의 방점이 무협이 아닌 '멜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고려 말 무신시대를 배경으로 권력을 둘러싼 이야기처럼 보이던 영화는 유백과 월소의 과거, 그리고 홍이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절절한 멜로영화로 분위기가 바뀐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인어공주' 등의 멜로영화로 박흥식 감독을 기억하고 있다면 영화 속 멜로의 감성이 반가울 것이다.


다만 영화는 시종일관 절절한 감정을 쌓는 것에만 집중한다. 무겁게 쌓이는 감정 때문에 영화의 후반부는 다소 집중력이 떨어지는 느낌도 든다. 세 배우의 연기는 흠잡을 곳이 거의 없다. 특히 이병헌이 보여주는 연기의 스펙트럼이 놀랍다.


'뷰티 인사이드', 평범함을 특별하게 만든 로맨스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매일 자고 일어나면 모습이 바뀌는 남자가 있다. 나이도 성별도 외모도 매번 달라지는 남자에게 평범한 일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는 낯설었던 자신의 변화를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익숙했던 특별함은 한 여자를 만나면서 불편함으로 바뀐다. 그녀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뷰티 인사이드'는 제작 단계부터 궁금증을 자아냈던 작품이다. 잠을 자면 모습이 바뀌는 남자와 그가 사랑한 여자의 로맨스라는 독특한 설정 때문이었다. 김대명·이범수·박서준·김상호·천우희·우에노 주리·이진욱·서강준·김희원·이동욱·고아성·김주혁·유연석 등이 특별한 남자 우진을 연기했다. 한효주가 우진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인 이수 역으로 이 배우들과 호흡을 맞췄다.


영화의 원작은 2012년 인텔과 도시바가 함께 제작한 동명의 소셜 필름이다. 컴퓨터의 메인보드를 매일 모습이 바뀌는 남자의 모습에 빗대 만든 광고 영화다. CF 감독 출신인 백 감독은 원작 속 설정을 빌려와 색다른 감성의 멜로로 영화를 완성시켰다. 화사한 조명, 인물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클로즈업 등 CF 감독 출신다운 기교가 돋보인다. 그러면서도 과하지 않은 스타일로 주제를 이끌어내는 연출력이 인상적이다. 



'뷰티 인사이드'의 가장 큰 매력은 특별해 보이는 로맨스를 평범하면서도 공감가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우진과 이수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의 이야기는 사실 보편적인 로맨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로의 비슷한 모습에 끌려 사랑에 빠지지만, 어느 순간 서로 다른 점이 더 눈에 띄게 되면서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는 점에서 익숙한 러브 스토리다. 


하지만 영화가 지닌 특별한 설정이 이 익숙한 이야기를 보다 낭만적으로 그려낸다. 한 사람을 자연스럽게 소화해낸 21명의 배우들, 그리고 이들과 탄탄한 호흡을 보여주는 한효주의 연기가 영화를 더욱 흡입력 있게 만든다. "사랑이 모든 걸 해결해줄 것 같지만 사랑이 모든 걸 망치기도 한다"와 같은 공감가는 대사도 곳곳에서 등장한다. 감성적인 멜로영화를 기다려온 관객이라면 그 기다림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아쉬움도 없지는 않다. 독특하고 기발한 설정을 두 남녀의 로맨스를 강화하기 위한 장치로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러나 로맨틱한 데이트 장면에서는 잘 생긴 미남 배우들만 등장하는 것도 눈에 밟힌다. '외모에 집착하는 현대인의 사랑'이라는 다소 진지한 이야기를 끌어내기에 충분한 설정이지만 영화는 대중적인 길을 택했다. 

'미쓰 와이프' 돈·성공보다 중요한 가족의 가치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인생에 가정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은 게임과 달리 리셋(reset)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면…"이라든가 "인생을 새로 산다면…" 같은 질문을 던지며 다른 인생을 꿈꾼다. 지금 우리가 인생에서 어떤 지점에 서 있는지를 알기 위한 질문일 것이다.


영화 '미쓰 와이프'는 또 다른 인생을 통해 잊고 지낸 삶의 중요한 가치를 깨닫게 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나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멋진 인생', 혹은 예전 TV에서 방송됐던 예능 프로그램 '인생극장'에서 다뤘던 익숙한 설정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것이다. 


주인공인 연우(엄정화)는 잘 나가는 싱글 변호사다. 어릴 적 원양어업을 하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어렵게 살아왔다. 연우는 "남자는 여자에게 백해무익하다"는 신념을 갖고 자신의 힘으로 성공하고자 열심히 인생을 살아왔다. 어머니까지도 세상을 떠나 남은 가족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연우는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다. 연우의 성공 비결은 단 하나, 바로 자본의 논리를 따르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연우의 화려한 삶은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한다. 사람의 운명을 관장하는 천계(天界)에서의 작은 실수로 벌어진 사고다. 생사의 갈림길 앞에서 연우는 한 가지 제안을 받는다. 한 달 동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산다면 다시 예전 연우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연우는 그 조건을 덥석 받아들인다. 그 다른 사람의 인생이 남편과 아이 둘 딸린 아줌마의 삶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영화 속 코미디는 변호사 연우와 아줌마 연우의 캐릭터가 빚어내는 충돌에서 생겨난다. 돈과 성공을 쫓던 싱글 변호사, 그리고 18세에 시집을 와 드라마와 영화 속 장면을 흉내 내는 것이 취미인 '짠순이' 아줌마 사이의 괴리감이 쏠쏠한 웃음을 만들어낸다. 


특히 배우 엄정화의 매력이 빛난다. 그동안 엄정화는 성공한 커리어우먼부터 뜨거운 모성애까지 여배우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연기를 보여준 바 있다. '미쓰 와이프'는 그런 엄정화의 다채로운 모습이 한데 녹아든 작품이다.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는 연우의 또 다른 비밀은 엄정화의 개인적인 삶과 맞물리면서 묘한 감동을 자아낸다. 


'미쓰 와이프'는 착한 영화다. 영화는 돈과 성공에 가려진 중요한 가치, 바로 가족의소중함을 이야기한다. 또한 영화는 연우의 변화를 통해 평범한 서민의 삶도 함께 응원한다. 다만 착한 감동을 위해 영화의 몇몇 설정들이 억지스럽게 짜인 점이 못내 아쉽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나 자신의 이름도 잊은 채 "누구 엄마"로 불리는 수동적인 아줌마의 삶을 긍정하는 영화의 태도도 조금은 마뜩찮다.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 에단 헌트, 팀으로 돌아오다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첩보원 사이에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는 곳이 바로 첩보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속 첩보원들은 늘 고독하다. 물론 예외도 있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IMF 요원들이 그렇다.


TV 드라마 시리즈를 바탕으로 1997년 영화화된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그동안 주인공 에단 헌트(톰 크루즈)의 원맨쇼와 같았다. 1편과 3편이 그나마 IMF 요원들의 팀워크를 활용한 이야기를 보여줬다. 그럼에도 기억에 남은 것은 중력의 법칙을 거스른 듯한 톰 크루즈의 액션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11년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부터였다. 3편에서 벤지 역으로 출연했던 사이먼 페그와 전략 전문 요원 브랜트 역으로 새롭게 가세한 제레미 레너의 활약이 톰 크루즈 못지않게 도드라졌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팀이 꾸려진 만큼 시리즈도 새로운 활기를 얻었다. 이들의 앙상블이 속편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


4년 만에 선보이는 속편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은 그런 기대를 채우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영화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IMF가 다시 위기에 처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모든 것을 비밀로 감춘 채 작전을 수행하는 IMF는 "구시대의 산물"이라는 이유로 해체된다. 전직 요원들로 구성된 반 IMF 단체인 신디케이트의 정체를 쫓던 에단 헌트는 소속도 나라도 없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홀로 불가능한 미션에 몸을 던진다. 여기에 신디케이트 소속인 의문의 여인 일사(레베카 퍼거슨)가 등장해 이야기는 흥미를 더한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인기 비결은 전 세계를 무대로 펼쳐지는 화려한 액션 시퀀스에 있다. 이번에는 미국과 영국은 물론이고 벨라루스, 오스트리아, 모로코 등을 중심으로 액션의 향연이 펼쳐진다. 오프닝을 장식하는 수송기에서의 액션은 스턴트 없이 온몸을 내던지는 톰 크루즈표 액션을 확인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빈의 오페라 극장에서 펼쳐지는 총격전은 우아하다. 모로코에서의 차량 추격전은 CG를 최대한 배제한 아날로그적인 액션의 쾌감을 가득 느낄 수 있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영국 런던에서의 액션 신은 고전적인 풍미를 자아낸다.


그러나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은 전작의 흥행 공식을 그대로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캐릭터의 강화, 그리고 이를 통한 팀워크의 강조는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의 가장 큰 특징이다. 위기에 처한 에단 헌트를 구하기 위해 하나 둘 모이는 벤지, 브랜트, 그리고 루크(빙 라메스)의 활약이 더해지면서 영화는 더욱 풍성한 재미를 보여준다. 전작들을 꾸준히 챙겨본 관객이라면 이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묘한 전율을 느낄 것이다. 남성 캐릭터 못지않은 액션 실력으로 존재감을 남기는 일사 역의 레베카 퍼거슨도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 포인트다. 


아쉬운 것은 악역 솔로몬 레인(숀 해리스)다. 개성 넘치는 IMF 요원들에 비해 다소 매력이 부족하다. 지혜의 왕이라는 솔로몬 왕의 이름을 빌려왔지만 영화 속 활약은 그에 못 미치는 느낌이 든다. 속편을 위한 여지를 남겨두기 위함이라면 수긍이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분명한 것은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은 전작보다 한층 유머러스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속편이라는 사실이다.

'베테랑', 뻔뻔한 재벌 향한 통쾌한 주먹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제 아무리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해도 그것은 현실을 반영한 영화일 뿐 현실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류승완 감독의 신작 '베테랑'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재벌과 경찰의 대결을 그린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다. 왜냐면 우리는 재벌들이 쉽게 법과 정의를 무시한다는 사실도, 법과 정의를 지켜야 하는 경찰이 재벌 앞에서는 쉽게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베테랑'은 관객에게 잠시나마 희망을 느끼게 만든다. 123분의 러닝타임 동안 펼쳐지는 광역수사대 형사 서도철(황정민)과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의 숨 막히는 대결을 보고 있노라면 류승완 감독의 말처럼 현실에서도 저런 형사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막연하게나마 생긴다. 심지어 영화와 같은 일이 현실에서도 벌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한 화물노동자의 투신자살 시도에서 시작한다. 평소 이 노동자와 친분이 있었던 서도철은 아주 단순한 이유로 사건 수사에 뛰어든다. 그것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아내와 아이를 둔 이 가장이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를 알고 싶다는 순전히 인간적인 이유에서다.


사건의 이면에는 재벌 3세 조태오가 있다. 재벌의 특권 의식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자본이라는 권력의 힘에 취한 조태오에게 법과 정의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에 다름 아니다. 서도철과 조태오의 대결은 그래서 단순한 경찰과 재벌의 대결이 아니다. 그 속에는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계급 관계가 담겨 있다. '베테랑'이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지점이다.


류승완 감독의 팬이라면 '베테랑'에서 그의 전작들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부당거래'다. 황정민·유해진·천호진의 캐스팅, 그리고 재벌·검찰·경찰 사이의 은밀한 밀월 관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격투기를 응용한 액션 신과 권투 장면은 '피도 눈물도 없이'와 '주먹이 운다'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명동에서의 차량 추격전과 액션 신은 '짝패'의 집단 격투신과도 연결된다. 중요한 것은 이런 부분들이 전작의 답습이나 복제에 머물지는 않다는 점이다. 류승완 감독은 자신의 장기를 변주하고 발전시켜 '베테랑'에 녹여낸다. 그런 점에서 '베테랑'은 류승완 감독의 새로운 대표작으로 칭할만 하다. 


물론 '베테랑'에서 가장 류승완 감독스러운 색깔은 가족주의에 있다. 재벌에 맞서는 서민의 힘이 곧 가족이라는 점은 조금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그러나 재벌이 될 수 없는 서민들에게 재벌과 맞설 수 있는 힘은 결국 한 가족처럼 뭉쳐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이야기로 유쾌함과 통쾌함을 전하던 영화는 그러나 엔딩에서만큼은 현실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영화의 정서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깔끔한 마무리다. '베테랑'의 주제는 명확하다.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는" 세상을 향해 "쪽팔리게 살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 간결한 메시지가 통쾌함을 전한다.

'픽셀', 키덜트 향수 자극하는 액션 어드벤처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어른이지만 아이이고 싶은 사람들. 키덜트(kidult, 'kid'와 'adult'의 합성어)는 이제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는 사회적인 트렌드다. 어릴 적 마음껏 즐기지 못했던 장난감이나 게임을 어른이 된 뒤 다시 하게 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경제적인 여유를 통해 그때의 추억과 즐거움을 제대로 느끼고 싶은 마음은 그 하나의 이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각박한 현실을 잊기 위함이다. 어른이 되면 행복한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던 믿음이 깨진 순간, 과거는 추억과 향수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마음을 파고든다. 


고전 아케이드 게임 캐릭터를 소재로 한 영화 '픽셀'의 지향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홀로 집에' '미세스 다웃파이어'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등 가족 관객을 위한 영화를 주로 만들어온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의 신작인 만큼 영화는 남녀노소 모두 다 즐길 요소를 갖추고 있다. 그러면서도 1980년대의 정서를 자극하는 장면들이 눈에 띈다. 영화가 이 시대에 유년 시절을 보낸 30~40대 관객을 겨냥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영화는 루저들의 이야기다. 소년 시절 아케이드 게임 세계 챔피언에 도전할 정도로 미래가 기대됐던 샘(아담 샌들러)은 어른이 된 지금 홈시어터를 설치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샘과의 대결에서 아케이드 게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던 에디(피터 딘클리지)는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고, 소년 시절부터 엉뚱했던 러드로우(조쉬 게드)는 어른이 된 지금도 음모론을 믿으며 철없는 삶을 살고 있다. 심지어 샘의 친구인 미국 대통령 윌(케빈 제임스)도 연일 하락하는 지지율로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시궁창 같던 이들의 삶은 그러나 외계인의 침공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이한다. 나사(NASA)가 외계로 보낸 아케이드 게임을 선전포고로 받아들인 외계인은 팩맨, 갤러그, 동키콩, 지네, 스페이스 인베이더 등 아케이드 게임 캐릭터로 나타나 지구 침공을 시작한 것이다. 외계인과 맞서기 위해 잊혀진 아케이드 게임 천재들이 다시금 소환된다. 그렇게 루저는 지구를 지킬 영웅이 된다.


'픽셀'은 '너드(nerd, 괴짜라는 뜻. 영화에서는 '덕후'로 번역됐다)'와 '키덜트'의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힘든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과거를 잊지 못하는 주인공들은 어떻게 보면 퇴행적인 캐릭터들이다. 그러나 각각의 배우들이 보여주는 코믹한 호흡이 캐릭터들에 호감을 불어넣는다. 마돈나, 홀 앤 오츠, 그리고 '스타워즈' 등 80년대 문화 아이콘도 끊임없이 언급된다. 지구를 위협하는 악당으로 재탄생한 아케이드 게임 캐릭터들의 모습도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고전 아케이드 게임 캐릭터를 소재로 삼은 기발한 설정을 전형적인 흐름으로 풀어낸 이야기가 아쉽기도 하다. 부정적인 느낌이 강한 너드 캐릭터들이 영웅으로 거듭난다는 스토리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익숙한 드라마 라인이다. 탄탄한 드라마보다는 CG를 이용한 볼거리에 치중한 것도 눈에 밟힌다. 하지만 그 시절 오락실에서의 추억이 있다면 '픽셀'은 특별하게 다가갈 것이다. 100원 짜리로 오락실에서 보냈던 시간이 지구를 지킬 수 있는 위대한 순간이 될 수도 있다는 영화의 메시지가 벅찬 감동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암살', 역사의 무게감과 장르의 절묘한 만남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연출한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가볍게는 다룰 수 없는 소재다. 그러나 장르영화의 대가인 타란티노 감독은 영화적인 상상력으로 역사의 무게감을 과감히 떨쳐냈다. 실제 역사와는 전혀 무관한 '바스터즈'의 결말이 극적인 쾌감으로 다가온 이유다. 


최동훈 감독의 '암살'을 보면서 '바스터즈'가 떠올랐다.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장르영화라는 점이 닮아서다. 그러나 '암살'은 '바스터즈'처럼 시종일관 유쾌하지 않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 '전우치' '도둑들' 등 최동훈 감독의 전작과 비교해도 영화는 다소 묵직하다.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의 아픔이 여전히 한국사회 속에 깊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암살'의 기본 스토리는 1933년 상하이와 경성을 배경으로 한 친일파 암살작전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독립군 안옥윤(전지현), 속사포(조진웅), 황덕삼(최덕문)과 임시정부대원 염석진(이정재), 그리고 이들을 쫓는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하정우)과 영감(오달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킨다. 충무로의 소문난 이야기꾼인 최동훈 감독의 변함없는 스토리텔링 실력이 여전히 빛난다.


영화는 1930년대의 이야기만 다루지 않고 1910년대부터 해방 이후 1949년까지 이야기의 무대를 확장시킨다. 한국 근대사의 한 순간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최동훈 감독의 장기인 장르영화로서의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인 배경만 때놓고 본다면 영화는 그럴싸한 느와르이자 첩보물이다. 역사적 무게감과 장르영화의 절묘한 만남이다.


물론 아쉬움도 없지는 않다. 최동훈 감독의 전작들에 비하면 짜임새가 헐거운 설정들이 유독 눈에 밟힌다. 스포일러라 밝힐 수 없지만 몇 가지 반전은 약간의 의아함이 들기도 한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만큼 영화의 플롯 또한 복잡하다. 끊임없는 우연과 오해 속에서 쌓여가는 긴장감은 140분의 긴 러닝타임을 지탱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다소 과하게 이야기를 꼬았다는 느낌이 든다.


'암살'은 영화적인 오락성과 완성도는 충분히 갖추고 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초호화 캐스팅에 순제작비 180억원에 달하는 '암살'이 다양한 기준을 지닌 대중의 기대치를 채울 수 있을지다. 개인적으로는 결말에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그 결말이 많은 관객의 마음을 깊이 파고들 것 같다.

'종이 달', 돈의 탐욕, 벗어날 수 없는 욕망의 민낯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돈은 한낱 종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 종이 한 장이 무시무시한 가치를 지닌다. 종잇조각에 부여된 이 가치가 우리의 삶을 때로는 풍족하게 만들고 때로는 피폐하게 만든다. 돈이 지닌 탐욕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에 집착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탐욕을 추구하는 삶의 결과는 희망과는 거리가 멀다고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연 돈이 지닌 달콤함을 부인할 수 있을까. 영화 '종이 달'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영화는 가쿠다 미쓰요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붕괴한 90년대 중반 일본을 배경으로 어느 평범한 주부의 이야기를 그린다. 주인공 리카(미야자와 리에)는 아이는 없지만 남편과 함께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여자다. 파트타임으로 일을 시작한 은행에서 계약직이 된 그녀는 부유한 노년층 고객들을 상대하며 나름의 보람도 느끼고 있다. 다만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삶이 조금 지루할 뿐이다. 


사건은 리카의 우연찮은 행동에서 비롯된다.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쇼핑하던 리카는 부족한 돈을 고객의 돈으로 대신해 계산하는 우발적인 행동을 범한다. 남의 돈이지만 빌려서 갚으면 된다는 생각에서 저지른 그 행동은 그러나 단조롭고 평온했던 삶에 작은 균열을 낸다. 점점 깊어지는 그 균열이 리카의 일상을 송두리째 흔든다. 


'종이 달'은 리카를 통해 언뜻 돈의 탐욕의 무서움을 고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평범했던 주부가 돈으로 인해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돈은 받을 때보다 줄 때 행복하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사기는 어느 새 억대의 횡령 사건이 된다. 그렇게 파국으로 향하는 리카가 어리석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영화는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돈의 탐욕에 빠져 눈이 먼 것처럼 보였던 리카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순간이다. 그때 관객은 커다란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사실은 리카와 같은 욕망이 있지 않냐는 날카로운 질문이다. 그 질문에 선뜻 아니라고 답할 수 없는 현실이 무거운 여운을 남긴다. 


미야자와 리에는 이 영화로 도쿄국제영화제와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 등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무덤덤한 표정이지만 그 속에 복잡한 내면을 담은 감정 표현이 인상적이다. '퍼머넌트 노바라'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로 일본 영화계에서 주목 받고 있는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손님', 공동체와 타자, 한국사회의 내면을 파헤치다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손님'이라는 말에는 반가움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다른 곳에서 찾아온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새로우면서도 낯설기 때문이다. 실제로 '손님'에서 '손'의 어원을 따라가면 '인간생활에 해를 끼치는 귀신'이라는 뜻이 있다. 천연두의 역신을 마마 혹은 손님이라 부른 이유다.


김광태 감독의 장편 데뷔작 '손님'에서도 손님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영화의 주인공인 우룡(류승룡)과 그 아들 영남을 뜻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마을 주민들이 두려워하는 낯선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영화는 그림형제의 동화로 잘 알려진 '피리 부는 사나이'의 스토리를 차용한다. 토속신앙과 서양동화의 이색적인 만남이 빚어내는 독특한 정서가 강렬한 첫 인상으로 다가온다. 


영화의 배경은 한국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1950년대다. 전쟁으로 아내를 잃고 한쪽 다리까지 다친 악사 우룡(류승룡)은 "눈도 나쁘고 이빨도 썩었고 기침까지 하는" 아픈 아들을 낫게 하기 위해 서울로 먼 길을 나선다. 미군이 던져준 종이 한 장만 들고 정처없이 길을 걷던 우룡은 우연히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작은 마을을 찾는다. 촌장(이성민)은 이들 부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단 한 가지,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는 단서를 달고 말이다.


'손님'의 긴장과 갈등은 공동체와 타자의 관계를 보여줘 흥미롭다. 완벽한 공동체일수록 외부에서 온 타자에게는 배타적이 될 수밖에 없다. 촌장이 우룡을 겉으로는 웃으며 반기면서도 속으로는 마뜩찮게 받아들이는 이유다. 그러나 그럴수록 타자는 공동체에 편입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촌장은 우룡에게 마을의 쥐를 잡아달라는 제안을 한다. 우룡을 내쫓으려는 목적의 약속이지만 우룡은 그것이 마을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해 수락한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그러했듯 '손님'의 우룡 또한 쥐를 잡는데 성공한다. 마을 사람과도 친분을 쌓는다. 그렇게 우룡과 영남은 마을 일원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공동체는 그렇게 쉽게 타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히 혈연과 지연 등으로 얽혀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촌장의 마지막 결단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촌장의 과거를 통해 영화가 다루는 공동체의 문제를 한국사회의 이야기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우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던 영화는 그렇게 한국사회의 내면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우룡이 자신의 아들을 가리키며 "호남에서 태어났지만 이름은 영남"이라고 말하는 대사가 단순한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심폐소생술로 가까스로 살려낸 시리즈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터미네이터'는 회생 불가능으로 여겨졌던 시리즈다. '전편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는 속설을 깨트린 2편에서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시리즈는 꾸역꾸역 3편과 4편으로 이어졌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어떻게든 전작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노력은 엿보였다. 하지만 시리즈를 억지스럽게 이어간다는 비판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할리우드는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때마침 인기 시리즈를 새로운 설정으로 다시 만드는 리부트(reboot) 열풍이 불고 있었다. 그렇게 6년 만에 시리즈 최신작인 '터미네이터 제니시스'가 우리 앞에 도착했다. 다 죽어가던 시리즈를 심폐소생술로 다시 살려내겠다는 할리우드의 강한 의지의 결과물이다. 


3편과 4편의 실패를 반영한 듯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시리즈의 원점인 1편으로 돌아간다. 여기에 작은 변화를 더해 이야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풀어간다. '스타트렉: 더 비기닝'이 기존 오리지널 시리즈와 또 다른 평행 우주를 만들어낸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시간여행과 이로 인한 미래의 변화가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핵심임을 떠올리면 나름 흥미로운 설정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1편과 2편의 오마주다. 인간 저항군의 리더인 존 코너의 엄마 사라 코너(에밀리아 클라크)를 죽이기 위해 터미네이터 T-800(아놀드 슈왈제네거)이 미래에서 1984년으로 온다. 이를 막기 위해 카일 리스(제이 코트니)가 과거로 따라오기까지는 1편의 익숙한 장면들로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여기에 2편의 악역이었던 T-1000(이병헌)의 등장은 갑작스럽기는 해도 추억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하다. 시리즈의 팬이라면 1편과 2편을 적절하게 섞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전반부가 반갑게 느껴질 것이다. 이 정도면 심폐소생술의 결과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진짜 이야기는 2017년의 샌프란시스코로 무대를 옮긴 뒤부터다. 새롭게 등장하는 터미네이터 T-3000(제이슨 클락)의 무시무시한 위용이 보는 이의 이목을 끈다. 그리고 지루할 겨를 없이 화려한 액션이 이어진다. 기술의 발전 덕분에 시각적인 볼거리는 더욱 다양하고 풍성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허전하다.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갖고 있던 주제의 무게감이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터미네이터' 1편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이야기했다. 2편은 그 지독한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처절한 사투를 그렸다. 시간여행으로 발생하는 패러독스, 그리고 인간과 기계 사이의 교감 등의 테마는 자연스럽게 영화에 녹아들었다. 그것이 '터미네이터' 시리즈 중에서도 유독 1편과 2편만이 계속해서 회자되는 이유다. 


물론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도 이와 비슷한 주제가 있다. 사라 코너와 팝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또 다른 T-800이 보여주는 교감이 그렇다. 그러나 새로운 해석이나 변주보다 기존에 보여준 주제의 답습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다루는 태도도 진일보하지 못한다. 실체가 없는 네트워크의 위협 앞에서 물리적인 저항을 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시대착오적으로 다가온다. 영화의 부족한 개연성을 "남겨진 의문에 대한 해답은 곧 찾아갈 것"이라는 속편의 암시로 해결하는 부분은 지나치게 상업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피할 수 없는 굴레일지 모른다. 영화를 연출한 앨런 테일러 감독도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시리즈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존 코너의 정체를 파격적으로 바꿔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할리우드 오락영화로서의 리부트'라는 목적은 충분히 이루었다. 기존 시리즈를 보지 못한 관객이라면 가볍게 즐길 수 있다. 하지만 팬이라면 두 손 들고 반길 수도, 그렇다고 마냥 외면할 수도 없는 애증의 작품이다.

'인사이드 아웃', 상상력과 감성, 픽사의 제대로 된 '부활'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픽사 애니메이션은 작은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자신들만의 세상을 꾸미고 살아가는 장난감, 밤마다 벽장을 통해 찾아오는 몬스터들의 세계, 요리를 하는 쥐와 풍선으로 날아가는 집까지 픽사의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다. 그러나 그 기발한 상상력에 속에는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따뜻함이 있다. 잊고 지낸 순수함이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음을 깨닫게 하는 마법 같은 순간. 그것을 느끼기 위해 우리는 픽사 애니메이션을 보고 또 기다린다.


'인사이드 아웃'은 최근 다소 실망스러운 작품을 보여준 픽사가 지난 한 해를 거르고 야심차게 선보이는 신작이다. 픽사 특유의 상상력과 감성이 변함없이 녹아있다. 주인공부터 그렇다. 11세 소녀 라일리의 머릿속 감정 컨트롤 본부에 있는 다섯 가지 감정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기쁨, 슬픔, 버럭, 분노, 소심으로 이름 붙여진 이들 감정은 라일리가 겪는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행동을 하게끔 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는 미네소타에서 평온한 삶을 살던 라일리가 부모님과 함께 멀고 먼 샌프란시스코로 이사오면서 겪게 되는 심리적인 갈등을 이들 다섯 가지 감정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연출은 피트 닥터 감독이 맡았다. '토이 스토리' 시리즈의 원안을 냈으며 '몬스터 주식회사' '업' 등을 감독이다. 실제 딸의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평소 밝고 유쾌하던 딸이 11세가 됐을 무렵 유난히 조용한 성격이 되자 피트 닥터 감독은 딸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궁금해 했다. 그런 상상력으로 '인사이드 아웃'의 시나리오를 썼다.


인간의 감정을 의인화한다는 것이 다소 허무맹랑한 설정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심리학과 인지과학 등을 바탕으로 한 체계적인 설정으로 설득력을 갖춘다. 감정과 행동, 기억과 잠재의식, 꿈과 무의식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요소들을 만화적인 상상력으로 구현한 장면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경이롭다. 영화 곳곳에 담겨 있는 픽사 특유의 매력적인 캐릭터와 유머도 즐거운 볼거리다. 


물론 '인사이드 아웃'은 단순히 상상력만 전시하지 않는다. 11세 소녀의 감정이 주인공이지만 영화는 어느 순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관객의 마음을 건드린다. 라일리의 상상 속 친구인 빙봉이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그렇다. '토이 스토리3'의 엔딩과 '업'의 오프닝을 잊지 못하는 팬이라면 두 손 들고 반길 수밖에 없는 '인사이드 아웃'의 하이라이트다. 


기억에 대한 이야기로 보는 이의 마음을 파고들던 영화는 다시 감정을 이야기하며 마지막을 향해 간다. 우리가 지닌 모든 감정을 솔직하게 받아들일 것, 그것이 곧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웃고 울리던 영화는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이 영화를 우리의 아이들에게 바칩니다. 제발 영원히 자라지 마렴(This film is dedicated to our kids. Please don't grow up. Ever)'이라는 자막으로 또 한 번 뭉클함을 안긴다. 우리가 기다려온 '진짜' 픽사 애니메이션이 돌아왔다. 

'나의 절친 악당들', 돈과 권력 향한 임상수 감독의 하이킥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지누(류승범)는 인턴 직원이다. "취직해서 월급쟁이가 돼 '따까리'로 사는 건 X 같은 거다"라고 말하는, 정규직이 보면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는 청년이다. 나미(고준희)는 맨발로 렉카차를 운전하는 거친 여자다. 가진 것 하나 없다는 점에서 나미와 지누는 닮았다. '나의 절친 악당들'(감독 임상수)는 이들에게 권력가의 검은 돈가방이 굴러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임상수 감독의 영화를 볼 때마다 불편함이 들었다. 그가 영화를 통해 그려낸 세상은 너무 위악적이었다. 상류층을 향한 풍자를 담은 '하녀'와 '돈의 맛'이 통쾌함보다 씁쓸함으로 기억에 남았던 이유다. 


'나의 절친 악당들'에서 임상수 감독은 영화 초반 돈가방을 배달하는 운전부로 출연한다. 등장과 동시에 일어난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는 역할이다. 영화에 작은 재미를 더하는 카메오 출연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전 영화와는 다른 영화를 만들겠다는 임상수 감독의 선언처럼 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실제로 '나의 절친 악당들'은 임상수 감독의 전작과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불편함이 덜하다. 세상에 대한 위악적인 묘사는 여전하지만 그 속에서 한결 힘을 뺀 캐릭터들이 눈에 띈다. 세상에 대한 큰 고민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욕망에 충실한 지누와 나미의 모습은 '쿨함' 그 자체다. 진지함과는 거리가 먼, 그럼에도 유쾌한 청춘의 모습이 두 캐릭터 속에 녹아 있다.


그러나 "젊은이에게 힘을 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임상수 감독의 말처럼 '나의 절친 악당들'이 지금 한국을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희망으로 다가갈지는 의문이다. 재벌을 위시한 상류층에 대한 풍자와 조롱을 담고 있지만 그 밑바탕에서 현실적인 공감대를 찾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돈가방을 둘러싼 지누와 나미, 그리고 회장(김주혁) 사이의 갈등과 대결에서도 계급투쟁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의식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영화적 긴장감을 만들어내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영화 후반부의 복수극이 생각만큼 짜릿하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뜬금없는 엔딩도 키치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그런 점들이 영화를 더욱 '임상수 감독스럽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경성학교', 이상하지만 매혹적인 영화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장르는 영화를 고르는 데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된다. 어떤 장르인지를 통해 영화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영화는 한 가지 장르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하 '경성학교', 감독 이해영)이 그렇다.


영화는 1938년 경성의 한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숲속 한 가운데 숨겨져 있는 기숙학교는 병든 소녀들이 모인 요양원이기도 하다. 이곳에 한 소녀가 찾아오면서 영화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폐병을 앓고 있는 소녀 주란(박보영)이 그 주인공이다. 


가상의 공간을 무대로 한 만큼 영화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가득 자아낸다. 주란과 함께 생활하게 된 소녀들은 주란의 일본어 이름이 시즈코라는 이유로 그녀를 경계한다. 주란이 이곳에 오기 전 똑같은 이름을 지닌 소녀 실종됐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시즈코와 절친했던 연덕(박소담)이 유일하게 주란에게 손길을 내민다. 소녀들의 일상에는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지만 이들을 둘러싼 어른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한 태도를 보인다. 늘 기품 있는 미소로 소녀들을 대하는 원장(엄지원)이 그 중심에 있다. 


영화의 미스터리한 분위기에서 관객은 공포와 스릴러라는 익숙한 장르적 전개를 예상하게 된다. 실제로 영화는 어느 정도 예상대로의 전개를 이어간다. 주란의 병세가 점점 호전되는 가운데 또 다른 소녀의 실종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 극적인 긴장감도 높아진다. 공포영화에서 볼법한 장면들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러나 '경성학교'는 후반부로 접어들수록 예상과 전혀 다른 의외의 전개를 이어간다. 기대를 배반하는 장르적인 변화다. 관객 입장에서는 낯설게 느껴질 부분이기도 하다. 다만 그 변화가 마냥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다. 그 변화의 이면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인 사실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경성학교'는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의 아픔을 가장 기발한 장르적 상상력으로 구현해낸 작품일지 모른다. 


호불호가 갈릴 영화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10대 소녀들의 감성을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연출이 눈에 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좋아한 관객이라면 반가워할 장면들도 영화 곳곳에 있다. 강렬한 비주얼로 담긴 미쟝센도 인상적이다. 엄지원, 박보영의 연기도 좋지만 이들 사이에서 강한 존재감을 남기는 신예 박소담의 매력이 빛난다. 이상하지만 매혹적인 영화다.

'쥬라기 월드', 욕심부리지 않고 이룬 시리즈의 부활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1993년 개봉한 '쥬라기 공원'은 매력적인 오락영화였다. 유전 공학으로 공룡을 되살려낸다는 기발한 설정에는 재난·공포·스릴러·어드벤처·가족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재미가 녹아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시리즈로 이어지면서 신선함을 자연스럽게 잃었다. 2001년 발표된 3편이 그 끝이었다. 


11일 개봉한 영화 '쥬라기 월드'는 '쥬라기 공원' 시리즈의 부활을 알리는 작품이다. 시리즈로는 14년 만에 만들어진 속편이다. 1993년 1편 이후 22년 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1편과 2편의 연출을 맡았던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 총괄로 자리를 옮겼다. 그를 대신해 '안전은 보장할 수 없음'으로 선댄스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콜린 트레보로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의 배경은 우여곡절 끝에 테마파크로 개장한 쥬라기 월드다. 전작들이 테마파크 개장 직전에 펼쳐진 위기를 그린 것과는 사뭇 다른 설정이다. 주인공도 새롭게 바꾸었다. 공룡 유전자 조작 연구를 담당하는 클레어(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와 공룡 조련사 오웬(크리스 프랫), 그리고 클레어의 조카인 그레이(타이 심킨스)와 자크(닉 로빈스)가 이야기를 이끈다.


긴 시간 끝에 만들어진 속편이기에 전작을 능가할 볼거리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쥬라기 월드'가 내세우는 볼거리는 바로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공룡 인도미누스 렉스다. 티라노사우르스 렉스의 유전자를 바탕으로 한 12m 크기의 거대한 공룡은 지적 능력으로 평화롭던 테마파크를 순식간에 공포의 무대로 바꿔버린다. 위기에 처한 그레이와 자크, 그리고 이들을 구하려는 클레어와 오웬의 모험이 긴박하게 펼쳐진다. 


과학 기술에 대한 맹신, 그리고 자본에 대한 탐욕이 빚어내는 비극과 같은 전작들의 주제는 '쥬라기 월드'에서도 반복된다. 특히 가벼운 재미에만 집중하는 21세기에 대한 비판의 시선이 눈에 띈다. 보다 큰 자극을 추구하기 위해 만든 인도미누스 렉스가 공원을 폐허로 만들어가는 모습이 그렇다. 원작 팬이라면 영화 후반부에 펼쳐지는 공룡들의 액션 신에서 눈을 떼기 힘들 것이다. 단순한 액션을 넘어 원작에 대한 존경을 담은 장면이기 때문이다.


'쥬라기 공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가족이라는 테마다. '쥬라기 월드'의 귀결점도 결국은 가족이다. 다만 영화는 클리셰를 있는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관습을 비틀며 뜻밖의 웃음을 선사할 줄 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이뤄낸 시리즈의 부활이다.

'극비수사', 소신껏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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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살면 마땅한 보답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세상을 더 알게 될수록 그 믿음이 헛됨을 느낀다. 군대에서 들었던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말이 사실은 바깥 사회에서도 진리처럼 통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우리는 소신을 버리고 속물이 돼야 한다는 위험한 유혹과 마주하게 된다. 


'극비수사'의 공길용(김윤석) 형사는 정의로운 형사다. 다른 형사들처럼 관례와 같은 촌지는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착한 형사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속물 근성에 젖지 않고 소신이 있다는 점에서 그는 정의롭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지 사건을 통해 돈과 명예 같은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런 공길용 형사에게 유괴사건이 주어진다. 재력가의 딸이 유괴된 사건이다. 사건 발생 이후에도 유괴범으로부터 연락이 없자 공길용 형사는 사건을 극비리에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수사는 쉽지가 않다. 자신을 탐탁치않게 여기는 관할 형사들의 경계 어린 시선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길용 형사가 사건을 맡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딸이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김중산(유해진) 도사의 한 마디, 바로 "공길용 형사의 사주여야만 유괴범을 잡을 수 있다"는 말 때문이다. 


희대의 유괴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극비수사'는 사건의 해결 과정에는 큰 관심이 없다. 인터넷 검색만 하면 범인 검거 과정이 다 나오는 실화를 굳이 미스터리하게 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곽경택 감독의 관심은 실제 사건이 벌어졌던 1970년대의 사회적인 분위기를 그리는데 있다.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데모 현장 속 병아리들, 그리고 비릿한 생선과 금고 속에 쌓인 돈을 오버랩시키는 오프닝에는 영화가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잘 담겨 있다.


공길용 형사, 그리고 김중산 도사에게 중요한 것은 "범인을 잡는 것"이 아닌 "아이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자신의 이익만을 쫓으려는 다른 형사들 앞에서 번번히 실패를 거듭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마음먹는 순간, 김중산 도사의 한 마디가 힘을 불어넣는다. "내게 남은 건 딱 하나, 소신뿐이네요." 


아이를 살리겠다는 소신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두 사람. 누군가는 이들에게서 지난해 한국사회가 겪었던 어떤 사건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극비수사'는 굳이 정치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1978년과 2015년, 정확히 37년이 지난 지금도 소신 있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삶은 늘 무시당하고 천대받는다. 영화는 이런 슬픈 현실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영화가 끝났다면 서글픈 마음으로 극장 밖을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곽경택 감독은 사건이 종결된 뒤에도 이들의 뒷이야기를 조금은 길게 펼쳐 보인다. 그것이 소신 있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작은 위로임을 알아채기란 어렵지 않다. '미운오리새끼'를 보면서 곽경택 감독이 앞으로도 힘을 빼고 여유로운 태도로 영화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극비수사'가 그 바람을 이뤄줬다.

'연평해전', 잊지 말자는 외침 뒤에 감춰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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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해전'(감독 김학순)은 2002년 6월 29일 서해 연평도 부근 NLL에서 벌어진 남한과 북한 해군 사이의 교전을 소재로 한 영화다.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터키와의 3·4위전이 열리던 날 일어난 비극이었다. 남한에서는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을 당했다. 


제작 단계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국사회의 오랜 갈등 중 하나인 이념 대립의 문제를 건드리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투자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촬영 도중 캐스팅이 바뀌기도 했다. 고충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영화에 뜻을 보탠 일반 관객의 힘 덕분이었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비를 마련해 마침내 영화로 완성될 수 있었다. 


영화는 남북 대립과 이념적인 문제 등 민감한 이야기를 최대한 배제하고 가족 중심의 감동 드라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 사건 당시 순직한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영화는 이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하는 아들, 그리고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지닌 남편 등 평범함이 이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관객과의 공감대 형성을 위한 의도임을 잘 알 수 있다.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관객 마음을 끌어들인 영화는 후반부에 펼쳐지는 전쟁의 참상으로 비로소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낸다. 전투 장면은 걱정한 것과 달리 준수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도망갈 곳 없는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외롭고도 참혹한 전투가 사실적으로 펼쳐진다. 평범한 개인의 삶이 거대한 이념 대립으로 벌어지는 전투로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두 눈을 뜬 채 바라보기란 쉽지 않다. 그 순간 영화는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단 하나다. 이들의 죽음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영화는 다소 투박하지만 전쟁 소재의 실화 드라마로서는 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다만 영화를 보고 난 뒤 한 가지 의아함이 생긴다. 영화는 연평해전의 희생자들을 잊지 말자고 말하지만, 정작 "왜" 잊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가 그 대답까지 담았다면 걷잡을 수 없는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됐을 것이다. 논쟁을 피하기 위한 상업적인 선택이지만 그것이 최선이었을지는 의문이 든다.

'샌 안드레아스', 공식대로 만든 재난영화

영화관/미리보는 영화


재난영화를 볼 때마다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재난 상황을 재현한 스펙터클한 영상은 그 자체로는 시각적인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스펙터클을 마냥 즐기기에는 마음이 불편하다. 재난 속에 참혹한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난영화는 몇 가지 '꼼수'로 이런 양가적인 감정을 숨긴다. '포세이돈 어드벤처' '타이타닉'처럼 재난에 처한 인물의 드라마를 강조하는 방식도 그 중 하나다. 혹은 '2012'처럼 물량공세로 만들어낸 재난의 풍경만을 보여주는 방법도 있다. 이런 영화에서는 재난의 속살을 보여주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조차 순식간의 일로 묘사할 뿐이다. 


'샌 안드레아스'에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다. 미국 서부를 강타한 대지진 속에서 딸을 구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온 주인공 레이(드웨인 존슨)와 엠마(칼라 구기노) 부부는 지진과 쓰나미로 폐허가 돼버린 시내를 돌아다니며 딸을 찾는다. 그런데 이 장면은 왠지 모르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엄청난 재난 상황이 벌어졌음에도 이들 주변에는 안타깝게 죽은 이들의 시체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설득력을 해칠 정도로 낯선 풍경이다. 


재난의 스케일만 놓고 본다면 '샌 안드레아스'는 여느 재난영화에 뒤지지 않는다. 후버 댐이 무너지고 로스앤젤레스 전역이흔들리며 금문교가 무너지고 폐허로 변해가는 샌프란시스코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좀처럼 눈을 떼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재난의 스케일에 비해 인물들의 드라마는 다소 빈약하다. 재난 속에서 관계를 회복해가는 가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새로움을 찾기도 힘들다. 구조대원인 주인공이 가족을 구한다는 이유로 구조 헬기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처럼 납득하기 힘든 설정도 눈에 밟힌다.


그러나 이는 '샌 안드레아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재난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어쩌면 영화는 그것을 알기에 그저 공식대로 이야기를 풀어냈을지도 모른다.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재난영화. '샌 안드레아스'의 목표는 딱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