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0여 년 동안 발표한 작품 수만 무려 40편. 수차례 아카데미 후보에 올라 한 번의 감독상과 작품상, 두 번의 각본상 수상. 73세의 나이에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감독 우디 알렌. 그러나 그는 해외에서의 명성과는 달리 국내에서는 늘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던 비운의 연출가이기도 하다. 나이로만 따지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마틴 스콜세지 못지않은 노장이지만, 신작이 나올 때마다 언제나 환영받는 두 감독과 달리 우디 알렌은 노장다운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곧 개봉을 앞둔 신작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역시 흥행을 고려해 제목이 바뀌는(원제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수모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진정한 작품 세계를 만나기란 여전히 어려워 보인다.
때로는 한없이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한없이 진지한 우디 알렌의 영화에는 삶과 죽음이라는 실존적인 고민이 그 기저에 깔려 있다. 희극과 비극을 넘나드는 그의 영화들 속에서 작지만 알찬 삶의 성찰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영화 속에서는 신경증적인 뉴요커를 대변하고 있지만, 사실 알고 보면 우디 알렌은 매사에 철저하고 생각이 깊은 사색가다. 손길이 닿지 않는 아득한 곳에 있는 그의 영화 세계와 조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마치 카운슬링 받듯 고민이 생길 때마다 그의 작품들을 하나씩 꺼내 그의 생각을 살펴보는 것이다.
삶에 지쳐 웃음과 활력을 잃어버렸다면...
알려진 대로 우디 알렌은 영화 연출자 이전에 잘 나가던 코미디언이었다. 어릴 적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던 우디 알렌은 10대 시절부터 카바레의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을 위한 극본을 썼다. 그때 처음 만나 지금까지 매니저로 활동 중인 잭 롤린스와 찰스 H. 조프가 그를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데뷔시키면서 우디 알렌의 경력은 시작됐다. 우디 알렌의 초기작들 중 코미디가 유난히 많은 이유다.
우디 알렌의 실질적인 데뷔작 <돈을 갖고 튀어라>(1969)는 매 시퀀스마다 우디 알렌만의 유머 감각이 살아 숨쉬는,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웃음을 참지 못하게 만드는 코미디영화다. 우디 알렌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지적인 농담들은 <돈을 갖고 튀어라>에는 없지만, 대신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을 연상케 하는 슬랩스틱 연기가 웃음을 책임지고 있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 비운의 은행 강도 버질의 이야기를 그린 <돈을 갖고 튀어라>에는 탈옥을 위해 비누로 만든 총은 비를 맞아 거품으로 변해버리고, 돈을 털러 간 은행에서 글자를 제대로 쓰지 못해 돈을 훔치기는커녕 오히려 봉변을 당하는 등 코믹한 상황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돈을 갖고 튀어라>는 그의 초기작을 대표하는 작품인 동시에 그의 본능적인 유머 감각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돈을 갖고 튀어라>로 시작된 우디 알렌의 코미디영화 계보는 이후 <바나나 공화국>(1971) <잠꾸러기>(1973)를 거쳐 80년대의 <젤리그>(1983) <브로드웨이의 대니 로즈>(1984)를 지나 <스쿠프>(2006)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디 알렌은 스칼렛 요한슨이 주연한 <매치포인트>의 작업 이후 특별히 스칼렛 요한슨을 위한 각본을 썼고, 그렇게 완성된 영화가 <스쿠프>다. 그래서 <스쿠프>는 청순함과 섹시함을 동시에 자랑하는 스칼렛 요한슨의 매력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그 속에서 우디 알렌은 나이가 들어도 변함없는 유머 감각을 선보이며 영화의 또 다른 축을 지탱한다. 우연히 연쇄살인범을 함께 추적하게 된 마술사와 여대생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린 <스쿠프>에서 우디 알렌은 마술사 시드니로 등장해 수다스런 언변과 능청스런 마술을 선보이며 녹슬지 않은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노년의 나이에도 20대의 스칼렛 요한슨과 호흡을 맞추며 어수룩하면서도 능청스러운 코믹 연기를 선보이는 우디 알렌은 늙은 모습마저도 너무나도 귀엽게 느껴질 정도다. 범죄자에서 범죄자를 쫓는 인물로 신분은 바뀌었을지언정 매사에 서투른 모습은 영락없는 <돈을 갖고 튀어라>의 주인공 버질이다. 심지어 자신의 죽음까지도 웃음의 소재로 이용하고 있는 <스쿠프>는 순수하게 웃음만을 위해 만들어진,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우디 알렌의 코미디다.
유한한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면...
코미디와 드라마, 뮤지컬과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 다양한 색깔의 영화들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채워온 우디 알렌이지만, 그 다채로운 필모그래피를 하나로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면 바로 삶과 죽음에 대한 실존적 고민일 것이다. 그에게는 코미디마저도 죽지 못해 살 수밖에 없는 삶의 한 가지 방식일 뿐이다.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삶이란 끔찍한(horrible) 삶과 비참한(miserable) 삶으로 나뉘어 있다”고 말하던 <애니 홀>(1977)부터다. 하지만 삶과 죽음을 모두 아우르는 성찰의 순간을 선사한 것은 <한나와 그 자매들>(1986)에 이르러서다.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절대 앎은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라는 톨스토이의 명언을 내세운 <한나와 그 자매들>은 세 자매와 주변 인물들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서로 다른 삶의 방식들을 드러내 보이는 영화다.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며 <애니 홀>과 함께 우디 알렌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한 <한나와 그 자매들>은 무엇보다도 삶의 무의미함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을 우디 알렌 스스로가 영화 속에서 연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디 알렌은 건강염려증에 걸린 미키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생이 한번 뿐이면 어때? 사는 것도 해볼 만한 경험이잖아? 평생 불확실성 속에 살게 되겠지만 그게 최선일 수도 있어.” 언제나 염세적인 세계관으로 세상을 비관하던 우디 알렌이 그럼에도 야단스런 수다를 떨며 웃음을 자아내고 있는 것은 무의미한 삶이기에 더욱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는 그의 인생관 때문이다.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1996)는 이를 더 밀고 나아가 뮤지컬의 형식을 빌려 긍정적인 삶을 노래한다. 골디 혼, 줄리아 로버츠, 드류 베리모어, 에드워드 노튼, 나탈리 포트만, 팀 로스 등 우디 알렌 영화 중 최초로 할리우드 톱스타들이 한데 모인 초호화 캐스팅의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는 90년대를 대표하는 우디 알렌의 영화라 해도 손색없는 작품이다. 뉴욕의 어퍼 이스트에 살고 있는 어느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이 작품은 영화 내내 인생에 대한 관조적인 시각을 따스하게 담아낸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중반에 등장하는 할아버지의 장례식 장면이다. 장례식에 모인 가족들이 불확실한 인생과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하자 관 속에서 할아버지의 영혼이 갑자기 튀어 나와 노래를 부른다. 무슨 걱정이 그리 많냐며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지금 현재를 즐기며 살라는 할아버지의 노래에 가족들은 위안을 얻는다. 이러한 우디 알렌의 인생관은 <멜린다와 멜린다>(2004)에서 영화의 형식으로 반복된다. 같은 인물의 이야기를 희극과 비극으로 담아낸 <멜린다와 멜린다>를 통해 우디 알렌은 곧 인생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희망적일 수도 절망적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복잡한 남녀관계로 머리가 터질 것 같다면...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우디 알렌 영화의 매력은 남녀관계를 다룰 때 가장 잘 드러난다. <애니 홀>이 그의 대표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속에 담긴 연애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 때문이다. <애니 홀>로 시작된 우디 알렌의 연애영화 계보는 2년 뒤 발표된 <맨하탄>(1979)으로 이어진다. 조지 거슈인의 ‘랩소디 인 블루’를 배경으로 맨해튼 시내의 풍경들을 시네마스코프를 통해 낭만적으로 담아낸 오프닝이 인상적인 <맨하탄>은 뉴요커 우디 알렌이 뉴욕에 바치는 헌가이며 <애니 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삶 속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관계의 양상을 포착해내려는 영화다. <맨하탄>에서 우디 알렌은 여러 남녀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 사랑과 관계에 대한 깊은 이야기들을 끄집어낸다. 우디 알렌이 연기한 주인공 아이삭은 나이 어린 여자친구 트레이시(마리엘 헤밍웨이)가 있지만, 아직 10대인 그녀와의 사랑에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며 친구의 애인 메어리(다이앤 키튼)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아이삭은 끝내 메어리와의 성격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뒤늦게야 트레이시가 자신의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지만 그녀는 이미 영국으로 떠날 준비를 마친 뒤다. <애니 홀>에서 그랬듯 <맨하탄>에서도 우디 알렌은 두 남녀 사이의 사랑이 격정적으로 불타오르다 서서히 식어가는 과정을 담백한 어조로 이야기하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남녀관계를 다룬 또 다른 영화로는 <애니씽 엘스>(2003)가 있다. 제이슨 빅스와 크리스티나 리치, 두 젊은 스타를 주연으로 캐스팅한 <애니씽 엘스>는 우디 알렌이 오랜만에 남녀관계를 다루고 있고,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하는 등 <맨하탄>과 비슷한 점이 많은 영화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애니씽 엘스>에서 우디 알렌은 영화의 중심에서 멀찍이 떨어져 주인공에게 조언을 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첫 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 제리(제이슨 빅스)와 아만다(크리스티나 리치) 커플의 이야기를 통해 영화는 남녀관계가 알고 보면 철저히 계산적인 관계로 이뤄져 있음을 넌지시 꺼낸다. 어떻게든 아만다의 호감을 사기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것과 그녀의 관심사에 무조건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제리의 모습은 코믹한 동시에 현시대의 연애의 단면을 예리하게 담아낸다. 아만다와의 삐걱대는 관계 속에서 제리는 극작가 도벨(우디 알렌)에게 고민을 상담하지만, 그럴 때마다 도벨은 “삶이란 다 그런 거야”라며 명확한 답을 내리길 거부한다. 하지만 그동안의 작품들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보면, <애니씽 엘스>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분명하다. 복잡해서 골치가 아픈 남녀관계도 알고 보면 결국 모두가 삶 속에서 겪게 되는 고민들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므로 연애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는 <애니 홀>과 <맨하탄> 그리고 <애니씽 엘스> 등으로 대변되는 우디 알렌의 연애영화 계보를 잇는 영화다. 현실적인 사랑을 믿는 비키(레베카 홀)와 로맨틱한 사랑을 꿈꾸는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가 바르셀로나에서 자유분방한 화가 후안(하비에르 바르뎀)을 만나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통해 우디 알렌은 다시 한 번 남녀관계에 대해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관계라는 것이 쉽게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인지, 사랑이라는 것이 언제나 상식의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인지, 조심스레 의문을 던지고 있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는 무엇보다도 진지한 주제를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더없이 우디 알렌스러운 영화다. “가장 최근에 나온 우디 알렌의 영화들 중 가장 재밌고 유쾌하다”는 해외 언론의 반응은 빈말이 아니다. 인생사 모든 고민을 들어주는 우디 알렌과 상담할 시간이 또 다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