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2008년은 <다크 나이트>로 기억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난 연말 해외 언론들이 발표한 2008년 최고의 영화 목록에서 <다크 나이트>보다도 빛나고 있던 것은 바로 대니 보일 감독의 <슬럼독 밀리어네어>이었다. LA 타임즈와 할리우드 리포트를 비롯해 여러 언론에서 최고의 영화로 뽑힌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제 8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총 8개 부문을 석권하며 영화에 대한 세간의 주목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심지어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는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수상한 상들과 올해의 영화에 포함된 리스트를 따로 정리해놓을 정도로 지난 한 해 동안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향해 전 세계가 보낸 반응은 뜨거웠다. 해외의 반응이 국내에 전해지는데 시간차가 있다지만 그럼에도 이런 반응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아무도 대니 보일이 이렇게까지 다시 각광받을 줄 몰랐다. 그러나 대니 보일은 어느 순간 다시 나타나 전 세계를 사로잡고 말았다. 그러므로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오프닝을 빌려 다음과 같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니 보일은 어떻게 전 세계를 사로잡았나?”
첫 번째 정답, 그는 천재였다.
대니 보일은 시작부터 끼를 가진 감독이었다. 적어도 1990년대 중반까지는 그에게 천재 감독이라는 칭호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성공적인 데뷔작 <쉘로우 그레이브>(1994)부터 그의 재능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대니 보일 감독은 거액의 돈
가방으로 인해 세 명의 절친한 청년들이 겪게 된 뜻밖의 사건을 그린 범죄스릴러 <쉘로우 그레이브>를 통해 풍자와
위트가 살아 숨 쉬는 스타일리시한 연출을 선보였고, 많은 사람들은 재능 있는 신인 감독의 등장을 뜨겁게 환영했다. 또한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이완 맥그리거는 <쉘로우 그레이브>를 통해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강하게 각인시키며 스타 배우로
나아가는 교두보를 마련했고, 각본을 맡은 존 호지 역시 <트레인스포팅>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게 됐다.

<쉘로우 그레이브>로 주목 받은 대니 보일은 2년 뒤 <트레인스포팅>(1996)으로 일약 스타 감독의
위치에 올랐다. 미래를 향한 꿈을 잃고 헤로인에 삶을 의지한 채 절망적으로 살아가는 에든버러의 젊은이들을 그린 어빈 웰시의 동명
소설은 존 호지의 각색을 거쳐 대니 보일을 통해 90년대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탄생하게 됐다. 이기 팝의 ‘Lust for
life’와 함께 “인생을 선택하라”며 거리를 질주하는 청춘들은 시대의 아이콘이 되기에 충분했다. 영화를 향한 언론의 반응도
뜨거웠다. 타임 아웃 런던은 “성공적인 영화”라고 치켜세웠고, 가디언은 동시대의 다른 영국영화들보다 더욱 사실적으로 젊은이들의
하위문화를 다루고 있음을 높게 평가했으며, 로저 에버트 역시 마약 중독자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영화의 세밀한 묘사에 찬사를
보냈다. 이기 팝과 언더월드, 블러, 펄프 등의 뮤지션들이 참여한 사운드트랙은 높은 음반판매율을 보이며 90년대 음악 신의
유행을 이끌었다. BFI(British Film Institute)가 선정한 100편의 영국영화 중 당당히 10위를 차지하고
있는<트레인스포팅>은 이완 맥그리거를 스타 배우로 자리매김하게 했으며, 시나리오 작가 존 호지에게 아카데미
노미네이트라는 업적을 선사했고, 무엇보다도 대니 보일에게는 앞으로의 영국영화계를 이끌어갈 기대주라는 엄청난 영예를 안겨줬다.
두 번째 정답, 그는 사기를 쳤다.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트레인스포팅>으로 화제의 중심에 선 대니 보일은 고국인 영국을 떠나 할리우드 진출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이어지고 말았다. 90년대 중반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천재감독 대니 보일의 재능은 눈앞에 다가온
밀레니엄 앞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90년대 후반 그가 발표한 두 편의 영화 <이완 맥그리거의 인질>과
<비치>는 <쉘로우 그레이브>와 <트레인스포팅>의 성공마저도 사기처럼 보일 정도로 대중과 평단에
실망을 안겨줬다.
<트레인스포팅> 이후 할리우드 스튜디오로부터 제의를 받던 대니 보일은 모든 제의를 거절하고 대신 영국 자본으로
할리우드 진출을 시도했다. <쉘로우 그레이브> 촬영 당시 존 호지가 썼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미국 관객을 겨냥해 만든
결과물이 바로 <이완 맥그리거의 인질>(1997)이었다. <트레인스포팅>으로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던 이완
맥그리거와 <마스크>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등을 통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카메론 디아즈가 주연을
맡아 관심을 모았던 <이완 맥그리거의 인질>은 그러나 빈약하고 허황된 이야기로 인해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트레인스포팅>에 못 미치는 범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총 제작비 1,200만 달러를 들인 영화는 결과적으로 성공을
기대했던 미국에서 426만 달러의 수익을 얻는데 그쳤다.
대니 보일의 실패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할리우드 자본을 끌어와 3년 만에 선보인 <비치>(2000)는 대니
보일에게 더욱 참담한 아픔만을 남겼다. X세대를 위한 ‘파리 대왕’이라는 평을 받은 알렉스 갈랜드의 소설을 영화화한
<비치>는 그동안 함께했던 이완 맥그리거 대신 <타이타닉>으로 인기 정점을 달리고 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캐스팅해 주목을 받았지만, 아시아를 떠돌며 배낭여행을 하는 청년을 통해 인간의 어두운 부분을 그려냈던 원작의 깊이는
사라진 채 화려한 낙원의 이미지만이 허공을 떠도는 공허한 영화로 완성되고 말았다. 영화는 비평가들로부터 공격 받았을 뿐만
아니라, 원작과 다른 엔딩으로 마무리 해 알렉스 갈랜드의 팬들로부터도 질타를 받았다. 또한 <이완 맥그리거의 인질>로
실망한 대니 보일의 팬들은 <비치>에서는 실망을 넘어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렇게 그의 이름은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트레인스포팅>의 영광도 우연에 불과했다는 의심을 남겨놓은 채.
세 번째 정답, 그는 운이 좋았다.
<이완 맥그리거의 인질>과 <비치>의 연이은 실패 이후, 자신의 고향과 다름없던 TV로 돌아가 몇 편의
디지털영화를 만든 대니 보일은 2년 뒤 아무도 예상치 못한 한 편의 영화를 들고 다시 대중의 앞에 등장했다. 알렉스 갈랜드가 쓴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공포영화 <28일 후..>(2002)를 통해 대니 보일은 초심으로 돌아가 여전히 녹슬지 않은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다시 한 번 대중들에게 각인시켰다. 분노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좀비로 변해버린 삭막한 런던을
배경으로 생존자들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고군분투를 그린 <28일 후..>는 조지 로메로 감독이 만든 좀비영화의
관습들을 이어가면서도 대니 보일 특유의 개성으로 차별화를 시도한 영화였다. 또한 라스 폰 트리에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안소니
도드 맨틀 촬영감독은 독특한 앵글과 자연스러운 촬영으로 영화의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한층 살려냈다. 800만 달러의 적은 예산을
들여 만든 <28일 후..>는 대중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미국 내에서만 총 4,5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다. 로저 에버트의 “터프하고 스마트하며 독창적인 영화”라는 평처럼 <28일 후..>는
<트레인스포팅>으로 보여줬던 대니 보일의 재능이 한낱 거짓은 아니었음을 증명해 보이는 작품이었다.

<28일 후>의 성공으로 힘을 얻은 대니 보일은 이후 <밀리언즈>(2004)와
<선샤인>(2007)을 통해 <이완 맥그리거의 인질>과 <비치>가 남긴 상처들을 훌훌 털어냈다.
우연히 돈 가방을 줍게 된 아이들의 이야기로 아동판 <쉘로우 그레이브>를 연상시키는 <밀리언즈>는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동화적인 감성으로 대니 보일의 또 다른 재능을 선보였으며, SF영화의 틀을 빌려 인간과 삶에 대한 철학적
메시지를 담은 <선샤인>은 익숙하고 진부해질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긴장을 잃지 않는 연출 솜씨로 SF영화에서도
변함없이 발휘되는 대니 보일의 재능을 다시 한 번 확인케 했다. 두 차례의 실패에도 대니 보일이 다시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데뷔 초부터 따라다닌 운 때문이 아니었을까라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번째 정답, 그것은 운명이었다.
그러나 <슬럼독 밀리어네어>(2008)로 다시 한 번 전 세계를 사로잡은 대니 보일은 지금쯤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전 세계 36개국에서 베스트셀러를 차지한 인도 출신 비카스 스와루프의 ‘Q&A’를 스크린으로
옮긴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그동안 대니 보일이 자신의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반복해왔던 테마들이 모두 담겨있는 그의
영화세계를 집대성한 작품이다.
“자말은 어떻게 백만장자 퀴즈쇼에서 최종상금이 걸려 있는 마지막 단계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퀴즈쇼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에 출연한 빈민가 출신 소년 자말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최종 라운드까지 오르게 되자, 부정행위를 의심한 경찰로부터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자말의 기구한 일생을 통해 가난으로
인한 편견과 그 속에서도 자말이 잃지 않으려고 했던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는 영화다. 대니 보일 특유의 감각적이고 속도감 있는
연출과 <28일 후..>의 안소니 도드 맨틀 촬영감독이 포착해낸 개성 넘치는 영상, 여기에 인도 출신 작곡가 A.R.
라흐만의 리드미컬한 음악이 더해진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영화적 재미와 함께 기쁨과 슬픔, 감동과 흥분을 잃지 않는
완급조절로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하고 있다. 데뷔작 <쉘로우 그레이브>부터 돈이라는 물질적 가치 앞에서 인간성의
문제를 다뤄온 대니 보일의 문제의식은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도 여전히 변함없으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질주하던
<트레인스포팅>의 마약중독자 청춘들은 빈민가 소년, 소녀의 모습으로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대니 보일 감독은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통해 삶도 어쩌면 퀴즈쇼와 같은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정답을 맞혀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의 이면에는 불행이라는 현실이 숨겨져 있다는, 그러므로 우리의 삶도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질문을
건네고 있다. 그럼에도 대니 보일 감독은 영화를 통해 잔인한 현실 속에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갑작스런 성공과 참담한 실패 앞에서도 다시 일어선 자신의 인생처럼, 행복은 운명처럼 그렇게 어느 순간 우리를 찾아온다고 대니
보일 감독은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통해 말하고 있다. 기쁨과 슬픔을 모두 아우르며 희망으로 나아가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긍정적인 태도는 어쩌면 대니 보일 감독이 그 동안 겪어 온 굴곡진 영화 인생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대니 보일이 전 세계를 사로잡게 된 것 역시 운명처럼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RECENT COMMENT